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낭 포슈 (문단 편집) === 유년기 === || [[파일:attachment/페르디낭 포슈/foch_room.jpg]] || || 포슈가 태어난 방. || 1851년 10월 2일 오트피레네 주[* 일명 "마른의 기적"으로 유명한 1차 대전 초반에 맹활약하는 [[조제프 조프르]](Joseph Joffre) 장군과 훗날 포슈의 상관이 되는 [[노엘 드 카스텔노]](Noel de Castelnau)도 배출했다.]에 위치한 타르브(Tarbes)라는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이름은 비범한 '''[[나폴레옹]]''' 포슈(Napoleon Foch)[* 물론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이름을 딴 것이다.]였고, 모친의 이름은 조피 뒤프레(Sophie Dupre)였다. 포슈의 외할아버지는 나폴레옹을 따라서 이탈리아 전역, 스페인 전역, '''[[아우스터리츠 전투]]'''도 참여해서 나폴레옹이 '''직접''' 용맹하다고 평가한 것과 동시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포슈의 삼촌 중 한명은 나폴레옹 휘하에서 북 치는 소년에서 장군으로 진급했다[* pg.4-5]. 이러한 나폴레옹의 영향은 포슈 집안에 팽배했고, 어린 시절의 포슈는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삼으며 성장했다. 포슈의 고모의 경우에는 포슈와 포슈의 형제들을 "작은 나폴레옹들"(little Napoleons)이란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남부는 보수적인 데다가 [[가톨릭]]의 영향이 강했는데, 그 영향으로 포슈의 형제 제르멩 포슈(Germain Foch)는 [[예수회]]에 들어갔으며, 포슈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게 된다.[* [[보불전쟁]] 후 들어서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경우에는 19세기 말부터 왕당파를 지지하고 정교 분리를 반대하는 가톨릭의 영향을 경계해서 극심한 반교권주의를 행사하게 되는데 예수회 일원이 형제인 데다가 독실한 신앙심으로 유명했던 포슈는 묘하게 차별을 받는다.] ||[[파일:attachment/페르디낭 포슈/young_foch.jpg]] || || 어린 시절의 포슈(가운데) || 이후 10대 중후반에 접어든 포슈는 [[알자스-로렌]]에 위치한 메스(Metz)의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한다. 그러던 와중 프랑스 제2제정을 붕괴시킨 [[보불전쟁]]이 터지고, 포슈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예비대로 지원하지만 전쟁 자체가 초고속으로 끝난 터라 활약 없이 해산된다.[* 그러나 잠시 징집된 사이에 조금이라도 훈련이 들어갔는데, 사병을 괴롭혀야 잘 싸우는 존재로 치부하는 무식한 지휘관들의 태도에 분통을 터뜨렸다. 포슈는 이 시절에 대해서 노년에 접어든 '''60대'''에 언급했는데 당시 포슈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메츠가 위치한 알자스-로렌이 독일에게 넘어갔지만, 포슈는 여전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점령한 도시에서 생활해야 하는 데다가 매일마다 독일 [[군악대]]가 프랑스인들의 사기를 떨구기 위해서 연주하는 후퇴곡을 들어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걸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잊지 않았던 포슈는 훗날 1918년 메츠가 탈환되자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프랑스 군악대에게 프랑스의 애국적인 노래를 연주하게 한 것이었다. 조국의 수모를 복수하기 위해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포슈는 가톨릭 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에 위치한 명문대 [[에꼴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한다.[* 참고로 당시 에꼴 폴리테크니크는 프랑스 코뮨과의 전투로 여러 흔적과 핏자국이 남은 상태였다.][* 포슈는 이전에도 군인의 길을 고려했지만 가족을 끔찍히도 사랑했던 나폴레옹 포슈의 반대 속에 번번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불전쟁 이후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포슈를 그의 아버지조차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즉, 보불전쟁이 없었더라면 명장 포슈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학교는 [[MIT]]나 [[Caltech]]에 비견되는 학교로 이곳에 입학한 사람은 사관생도라기보다는 이공계 영재로 간주되었다.[* 유명한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 입학 후 포병 병과를 택한 포슈는 특이하게도 독일만을 프랑스의 주적으로 생각한 탓에 조제프 갈리에니나 [[조제프 조프르]]등 1차 대전 프랑스의 명장들과 달리 식민지 복무를 거부했다. 대신 자신의 출생지인 타르브나 브루티뉴 반도 등 프랑스 내에서 복무한다. 브리티뉴에서 9살 연하의 부유한 집안의 딸 줄리 비엥베뉴(Julie Bienvenüe)를 만나서 결혼한다. 둘의 금슬은 대단한 편으로 전쟁 중에도 서로 편지를 꾸준히 보냈으며 1914년에 연합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가 파리조차 많은 사람들이 파리에서 도망갔음에도 남편이 독일군을 자신이 막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가족과 함께 파리에 남았다. 1919년에 포슈 전기를 출간한 A.H. Atteridge의 경우에는 빠른 진급이 확정되는 식민지 복무를 거부한 것을 성실성으로 해석해서 포슈를 매우 극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